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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판서가 지낸 영주 삼판서고택, 의료기관 제민루
- 삼 판서라는 말은 세 명의 판서라는 뜻이다. 삼판서고택은 세 명의 판서가 살았던 고택으로 영주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구성공원 남쪽의 위치(현재 영주동 431번지)하였으나 1961년 대홍수로 무너지고 2008년 10월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구학공원에 복원 및 이전되었다. 세 명의 판서를 소개하자면 첫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이다. 정운경은 문신으로 조선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아버지이다. 1326년(충숙왕 1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330년 문과에 급제해 상주목 사록으로 나가며 여러 벼슬을 거쳐 치적을 쌓았다. 두 번째 주인은 정운경의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이다. 황유정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문신으로서 초계군수와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세 번째 주인은 황유정의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당에게 물려주었고 이때부터 김판서의 후손들이 살았다. 이러한 덕택에 다양한 판서와 고위직을 배출한 명문가의 고택으로서 그 기를 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수능보기 전이라던가 공무원시험치기 전에 기를 받아간다. 옆에는 제민루가 있다. 제민루는 2층 누각으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지방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병원 역할을 하기 보다는 서당과 학자들의 공부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선조31년(1598년)에 군수 이대진이 제민루 북쪽에 의국을 만들고 의료 업무를 보았다. 공립 의원이지만 향촌 사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양반, 상민, 천민, 승려 등 100여 명이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1961년 홍수로 붕괴되고 1965년 현재 자리에 세워지고 2007년에 누각을 개축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위치: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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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판서가 지낸 영주 삼판서고택, 의료기관 제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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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판서가 지낸 영주 삼판서고택, 의료기관 제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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