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뉴스 검색결과
-
-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중국 남송대 인장(印章)‧인장함 발견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이귀영)는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국립제주박물관(관장 김유식)과 공동으로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인근해역을 조사한 결과, 국내 최초로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 인장 두 과(顆)와 인장함이 일습(一襲)으로 발굴되었다. 두 과의 인장과 인장함은 해저에 있는 바위 사이 모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인장들은 선박에 타고 있던 상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과 모두 재질은 목재이다. 이 중 한 과(인장1, 1.7cm×1.7cm, 높이 2.3cm)는 정사각형 인신(印身, 도장 몸체) 위에 단순한 형태의 인뉴(印鈕, 손잡이)가 있다. 인면(印面)에는 ‘謹封(근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근봉은 ‘삼가 봉한다’는 의미로 서신을 발송할 때 봉투에 찍거나, 물건을 포장하고 그 위에 찍는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면에 새겨진 글자 획 사이에는 붉은색 인주까지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우리나라 인장 중에서도 ‘근봉’이 있으나 조선 시대 것들이다. 다른 한 과의 인장(인장2, 1.4cm×2.8cm, 높이 2.2cm)은 인면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국 학계의 분류에 따르면 길상무늬를 새긴 초형인(肖形印)에 해당된다. 문양은 크게 위아래로 구분되는데 상부는 동전 모양으로 추정되나 명확하지 않으며, 하부는 불분명하다. *초형인(肖形印): 인면에 길상(吉祥)의 그림이 새겨진 인장 인장함은 조각으로 발견되어 원래 형태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사각형 몸체에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성분은 납과 주석이다. 제주 신창리 수중유적은 1983년 3월 해녀가 조업 중 발견한 금제장신구를 신고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그해 4월,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수중조사를 진행하여 추가로 금제장신구 2점을 발견하였다. 1997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이 해역을 추가 조사하면서 중국 남송 시대 도자기(청자)를 확인하였다. 이들은 푸젠성(福建省)에서 제작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龍泉窯)’에서 제작된 청자들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 수중탐사로 ‘금옥만당(金玉滿堂)’, ‘하빈유범(河濱遺範)’ 명문이 찍힌 청자를 포함한 500여 점의 중국 남송대 청자(조각)를 추가로 수습하기도 하였다. *수중탐사 : 수중의 현상 변경없이 해저면의 상태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육상의 지표조사와 같음 이번 수중발굴조사는 지난해 9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한 수중탐사 이후정밀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루어졌다. 기존 조사가 해저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조사는 해저에 쌓인 모래를 제거하면서 해저상의 유물양상을 수중고고학적 조사방법으로 처음 확인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좁은 범위(10m×30m)에서 인장, 인장함뿐 아니라 400여 점의 도자기 조각들도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신창리 수중유적에서 발견된 다량의 남송 시대 도자기는 당시 중국, 한국, 일본 간의 해상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들이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아마미오섬(奄美大島) 쿠라키자키(倉木崎) 수중유적에서도 같은 양식의 도자기들이 확인되었다. 인장의 경우 선박에 타고 있던 상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특히 해양교류 등 관련 연구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제주 신창리 해저 발굴결과를 기존 조사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제주박물관과 공동으로 발굴보고서를 작성하고 공유할 계획이다. 또한, 신창리 해역을 추가 조사하는 한편, 양 기관이 협력하여 제주도 전 해역에 대한 수중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제주도가 과거 국제교류 상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밝힐 것이다.
-
- 뉴스
- 종교/학술
-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중국 남송대 인장(印章)‧인장함 발견
-
-
대구의 무형문화재 한자리에 모인다!
- - 무형문화재 제3호 욱수농악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24 ~ 29일 6일간 - 10.12 ~ 10.13 판소리 심청가 등 개인공연 진행
-
- 뉴스
- 전시/공연
-
대구의 무형문화재 한자리에 모인다!
여행 검색결과
-
-
인조가 머물렀던 정자, 대구 하목정
- 하목정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2019년 12월 30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2053호로 승격되었다.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이 세운 정자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 하였다. 이종문의 맏아들인 이지영에게 인조가 써주었다고 한다. 정면에는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정면 1칸, 측면 4칸의 방들이 서로 붙어서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되어있다. 일반적인 외가는 처마 모서리가 뾰족한 것에 반해 하목정은 지붕이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처마 곡선이 부채모양의 곡선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김명석과 남용익 등 여러 명인들의 시액이 있다. 하목정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며 조선 중, 후기 별당건축의 좋은 예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서까래 위에 부연을 달지 않지만,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 이곳은 특히 배롱나무가 유명해 배롱나무 명소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행 인플루언서들이 자주 다녀간 곳으로 하목정 뒤에 위치하고 있는 백일홍 나무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붉은색 꽃이 한옥과 매우 잘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상당히 깔끔하게 사진이 나오기에 연인들이 주로 많이 찾아오는 이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옆에는 낙동강이 흐르기에 경치를 감상하기 좋고 뒤에는 백일홍나무들이 여러 그루가 있어 벤치에 앉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
- 추천관광지
- 대구
-
인조가 머물렀던 정자, 대구 하목정
-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있는 곳, 육신사 마을
- 조선시대는 왕권 다툼의 이야기가 많다. 그중 어린 왕 단종에게 왕권을 빼앗아 왕이 된 세조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단종의 복위를 꿈꾼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를 일컬어 사육신이라 한다. 그중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꿈속에서 나머지 다섯 인물을 보아 그 후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됐다. 하빈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에 낙빈이란 현액을 하사받게 되었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형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철거되었지만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었다. 육신사를 찾기 위해 마을 입구를 들어설 때 충심을 알 수 있는 문인 충절문을 지나게 된다.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곳은 하빈면의 깊숙한 곳으로 묘골이라 칭하는데 지도상으로 봐도 산으로 둘러져있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박팽년 가문은 삼족을 멸하게 되었고 여성들은 관노로 이끌리게 되었다. 며느리가 임신한 상태여서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노로 삼게 되는 상황에 친정의 도움으로 아들을 노비의 딸과 바꿔치기해 멸족을 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사람을 잘 볼 수 없는 구석진 곳이라 한적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조용한 육신사를 둘러보고 돌아간다. 이곳은 조용한 집성촌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구시와 달성군은 국비, 시비, 군비를 합해 한옥을 개축하고 기념관을 설립해 관광지로 조성했다. 육신사는 태고정과 도곡재에서 그 유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도곡재는 대사성 서정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인데 1980년대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박종우는 인조 때 사람으로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한강 정구를 알아보려면 성주에 있는 회연서원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 위치: 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
- 추천관광지
- 대구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있는 곳, 육신사 마을
추천관광지 검색결과
-
-
인조가 머물렀던 정자, 대구 하목정
- 하목정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2019년 12월 30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2053호로 승격되었다.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이 세운 정자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 하였다. 이종문의 맏아들인 이지영에게 인조가 써주었다고 한다. 정면에는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정면 1칸, 측면 4칸의 방들이 서로 붙어서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되어있다. 일반적인 외가는 처마 모서리가 뾰족한 것에 반해 하목정은 지붕이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처마 곡선이 부채모양의 곡선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김명석과 남용익 등 여러 명인들의 시액이 있다. 하목정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서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며 조선 중, 후기 별당건축의 좋은 예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서까래 위에 부연을 달지 않지만,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 이곳은 특히 배롱나무가 유명해 배롱나무 명소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행 인플루언서들이 자주 다녀간 곳으로 하목정 뒤에 위치하고 있는 백일홍 나무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붉은색 꽃이 한옥과 매우 잘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상당히 깔끔하게 사진이 나오기에 연인들이 주로 많이 찾아오는 이곳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옆에는 낙동강이 흐르기에 경치를 감상하기 좋고 뒤에는 백일홍나무들이 여러 그루가 있어 벤치에 앉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
- 추천관광지
- 대구
-
인조가 머물렀던 정자, 대구 하목정
-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있는 곳, 육신사 마을
- 조선시대는 왕권 다툼의 이야기가 많다. 그중 어린 왕 단종에게 왕권을 빼앗아 왕이 된 세조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단종의 복위를 꿈꾼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를 일컬어 사육신이라 한다. 그중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꿈속에서 나머지 다섯 인물을 보아 그 후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됐다. 하빈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에 낙빈이란 현액을 하사받게 되었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형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철거되었지만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었다. 육신사를 찾기 위해 마을 입구를 들어설 때 충심을 알 수 있는 문인 충절문을 지나게 된다.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곳은 하빈면의 깊숙한 곳으로 묘골이라 칭하는데 지도상으로 봐도 산으로 둘러져있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박팽년 가문은 삼족을 멸하게 되었고 여성들은 관노로 이끌리게 되었다. 며느리가 임신한 상태여서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노로 삼게 되는 상황에 친정의 도움으로 아들을 노비의 딸과 바꿔치기해 멸족을 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사람을 잘 볼 수 없는 구석진 곳이라 한적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조용한 육신사를 둘러보고 돌아간다. 이곳은 조용한 집성촌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구시와 달성군은 국비, 시비, 군비를 합해 한옥을 개축하고 기념관을 설립해 관광지로 조성했다. 육신사는 태고정과 도곡재에서 그 유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도곡재는 대사성 서정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인데 1980년대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박종우는 인조 때 사람으로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한강 정구를 알아보려면 성주에 있는 회연서원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 위치: 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
-
- 추천관광지
- 대구
-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있는 곳, 육신사 마을
-
-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중국 남송대 인장(印章)‧인장함 발견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이귀영)는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국립제주박물관(관장 김유식)과 공동으로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인근해역을 조사한 결과, 국내 최초로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 인장 두 과(顆)와 인장함이 일습(一襲)으로 발굴되었다. 두 과의 인장과 인장함은 해저에 있는 바위 사이 모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인장들은 선박에 타고 있던 상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과 모두 재질은 목재이다. 이 중 한 과(인장1, 1.7cm×1.7cm, 높이 2.3cm)는 정사각형 인신(印身, 도장 몸체) 위에 단순한 형태의 인뉴(印鈕, 손잡이)가 있다. 인면(印面)에는 ‘謹封(근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근봉은 ‘삼가 봉한다’는 의미로 서신을 발송할 때 봉투에 찍거나, 물건을 포장하고 그 위에 찍는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면에 새겨진 글자 획 사이에는 붉은색 인주까지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우리나라 인장 중에서도 ‘근봉’이 있으나 조선 시대 것들이다. 다른 한 과의 인장(인장2, 1.4cm×2.8cm, 높이 2.2cm)은 인면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국 학계의 분류에 따르면 길상무늬를 새긴 초형인(肖形印)에 해당된다. 문양은 크게 위아래로 구분되는데 상부는 동전 모양으로 추정되나 명확하지 않으며, 하부는 불분명하다. *초형인(肖形印): 인면에 길상(吉祥)의 그림이 새겨진 인장 인장함은 조각으로 발견되어 원래 형태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사각형 몸체에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성분은 납과 주석이다. 제주 신창리 수중유적은 1983년 3월 해녀가 조업 중 발견한 금제장신구를 신고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그해 4월,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수중조사를 진행하여 추가로 금제장신구 2점을 발견하였다. 1997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이 해역을 추가 조사하면서 중국 남송 시대 도자기(청자)를 확인하였다. 이들은 푸젠성(福建省)에서 제작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龍泉窯)’에서 제작된 청자들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 수중탐사로 ‘금옥만당(金玉滿堂)’, ‘하빈유범(河濱遺範)’ 명문이 찍힌 청자를 포함한 500여 점의 중국 남송대 청자(조각)를 추가로 수습하기도 하였다. *수중탐사 : 수중의 현상 변경없이 해저면의 상태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육상의 지표조사와 같음 이번 수중발굴조사는 지난해 9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한 수중탐사 이후정밀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이루어졌다. 기존 조사가 해저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조사는 해저에 쌓인 모래를 제거하면서 해저상의 유물양상을 수중고고학적 조사방법으로 처음 확인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좁은 범위(10m×30m)에서 인장, 인장함뿐 아니라 400여 점의 도자기 조각들도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신창리 수중유적에서 발견된 다량의 남송 시대 도자기는 당시 중국, 한국, 일본 간의 해상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들이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아마미오섬(奄美大島) 쿠라키자키(倉木崎) 수중유적에서도 같은 양식의 도자기들이 확인되었다. 인장의 경우 선박에 타고 있던 상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특히 해양교류 등 관련 연구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제주 신창리 해저 발굴결과를 기존 조사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제주박물관과 공동으로 발굴보고서를 작성하고 공유할 계획이다. 또한, 신창리 해역을 추가 조사하는 한편, 양 기관이 협력하여 제주도 전 해역에 대한 수중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제주도가 과거 국제교류 상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밝힐 것이다.
-
- 뉴스
- 종교/학술
-
제주 신창리 바다에서 중국 남송대 인장(印章)‧인장함 발견
-
-
대구의 무형문화재 한자리에 모인다!
- - 무형문화재 제3호 욱수농악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24 ~ 29일 6일간 - 10.12 ~ 10.13 판소리 심청가 등 개인공연 진행
-
- 뉴스
- 전시/공연
-
대구의 무형문화재 한자리에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