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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
- [사진출처 경주시청 홈페이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 경주시청(시장 주낙영)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과 추진 중인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중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임. 천(天)ㆍ가루라(迦樓羅) / 용(龍)ㆍ야차(夜叉) / 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 / 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喉羅伽) 등 하늘의 천신(天神), 땅에 사는 지신(地神)과 축생(畜生), 물에 사는 수신(水神),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半人半神)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의미함.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임.읍성 동벽의 치성 기단석으로 사용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읍성 5구간(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의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다.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개소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며 놓여 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되었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 이다.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되어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의 면석이 발견되었다. * 북쪽면 : 길이 148cm · 너비 75cm, 남쪽면 : 길이 184cm · 너비 75cm, 동쪽면 : 길이 166cm · 너비 75cm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음경주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 96호인 경주 읍성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성보조(城保條)」에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고려 우왕(禑王) 무오(戊午)년(1378년)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는 기사가 있음.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내용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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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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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계룡시] 유서 깊은 역사가 가득한 계룡의 명소
- 계룡시는 충청남도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계룡산에서 명칭을 따온 것인데 계룡산 외에도 다양한 명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괴목정 괴목정은 유서가 깊은 공원으로 예전에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사람들에 의해 괴목이 심겨졌고, 이 괴목이 정자와 같은 역할을 하여 괴목정이라 불렀다. ○ 주소 :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 4-1 주초석 주초석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후 계룡산 남쪽에 천도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돌이다. 물길이 멀어 공사가 중단되자 당시에 사용하던 주초석을 그대로 두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어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군사보호구역으로 출입은 제한되어있다. ○ 주소 : 충남 계룡시 두마면 입암리 사계고택 조선 중기 계축옥사로 낙향한 사계 김장생 선생이 머물렀던 사계 고택. 사계 선생은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신독재 김집 등 당시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양성하였다. 10여채의 기와집과 정원, 연못으로 구성되어있다. ○ 주소 : 충남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22-4 계룡대 통일탑 높이 36m의 계룡대 통일탑은 웅장함과 위엄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국군의 충·의·지·인·용 기치 아래 철통 같이 나라를 지키고 승리의 영광을 거두며 민족의 번영과 약진을 보장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군사보호구역으로써 출입이 제한된다. ○ 주소 :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 (사진출처 : 계룡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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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계룡시] 유서 깊은 역사가 가득한 계룡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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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도후보지을 볼수있는, 계룡 주초석
- 이성계가 조선 건국 후 계룡산 남쪽 신도안을 천도 후보지로 정해 1년여간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궁궐공사를 위해 목재와 석재 등을 운반하다가 중단하였다. 중단 사유는 계룡산 신도안은 국토 남쪽에 치우치고 가까운 곳에 조운(漕運)과 용수(用水)가 불편하고 풍수상 舊 왕조 고려개경과 유사하여 신 왕조에 불리하다는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건의에 따라 중단하고 한양으로 신도읍지를 옮긴 것이다. 이때 대궐터 앞에 주춧돌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주초석 115개가 남아 1976년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 ․ 보존되고 있다. 주초석 중 20여개는 바위에 흠집이 일렬로 나있어 쓰기 좋은 크기로 다듬어 가공하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정으로 바위에 구멍을 내고 마른 참나무 등을 그 곳에 꽂아 나무에 물을 부으면 물의 수축팽창 압력으로 바위를 다듬은 것으로 자연과학의 원리를 응용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부남리 백암동 계곡은 도읍지 공사 일환으로 하천을 정비한 천기석축(川基石築)이 발견되기도 하여 현재 도시 개발의 기반시설을 하듯 당시에도 상 ․ 하수시설 등 생활의 기본시설을 하였던 것을 추측해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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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도후보지을 볼수있는, 계룡 주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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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
- [사진출처 경주시청 홈페이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 경주시청(시장 주낙영)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과 추진 중인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중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임. 천(天)ㆍ가루라(迦樓羅) / 용(龍)ㆍ야차(夜叉) / 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 / 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喉羅伽) 등 하늘의 천신(天神), 땅에 사는 지신(地神)과 축생(畜生), 물에 사는 수신(水神),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半人半神)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의미함.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임.읍성 동벽의 치성 기단석으로 사용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읍성 5구간(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의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다.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개소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며 놓여 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되었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 이다.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되어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의 면석이 발견되었다. * 북쪽면 : 길이 148cm · 너비 75cm, 남쪽면 : 길이 184cm · 너비 75cm, 동쪽면 : 길이 166cm · 너비 75cm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음경주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 96호인 경주 읍성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성보조(城保條)」에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고려 우왕(禑王) 무오(戊午)년(1378년)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는 기사가 있음.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내용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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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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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
- [사진출처 경주시청 홈페이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 경주시청(시장 주낙영)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과 추진 중인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중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된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임. 천(天)ㆍ가루라(迦樓羅) / 용(龍)ㆍ야차(夜叉) / 건달바(乾闥婆)ㆍ아수라(阿修羅) / 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喉羅伽) 등 하늘의 천신(天神), 땅에 사는 지신(地神)과 축생(畜生), 물에 사는 수신(水神), 그리고 인간도 신도 아닌 반인반신(半人半神)이나 귀신같은 것들을 의미함.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임.읍성 동벽의 치성 기단석으로 사용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읍성 5구간(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의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다.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개소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며 놓여 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되었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 이다.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되어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의 면석이 발견되었다. * 북쪽면 : 길이 148cm · 너비 75cm, 남쪽면 : 길이 184cm · 너비 75cm, 동쪽면 : 길이 166cm · 너비 75cm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음경주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 96호인 경주 읍성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성보조(城保條)」에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고려 우왕(禑王) 무오(戊午)년(1378년)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는 기사가 있음.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내용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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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邑城) 성벽 학술발굴조사 중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 부조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