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조선 건국 후 계룡산 남쪽 신도안을 천도 후보지로 정해 1년여간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궁궐공사를 위해 목재와 석재 등을 운반하다가 중단하였다.
중단 사유는 계룡산 신도안은 국토 남쪽에 치우치고 가까운 곳에 조운(漕運)과 용수(用水)가 불편하고 풍수상 舊 왕조 고려개경과 유사하여 신 왕조에 불리하다는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건의에 따라 중단하고 한양으로 신도읍지를 옮긴 것이다.
이때 대궐터 앞에 주춧돌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주초석 115개가 남아 1976년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 ․ 보존되고 있다.
주초석 중 20여개는 바위에 흠집이 일렬로 나있어 쓰기 좋은 크기로 다듬어 가공하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정으로 바위에 구멍을 내고 마른 참나무 등을 그 곳에 꽂아 나무에 물을 부으면 물의 수축팽창 압력으로 바위를 다듬은 것으로 자연과학의 원리를 응용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부남리 백암동 계곡은 도읍지 공사 일환으로 하천을 정비한 천기석축(川基石築)이 발견되기도 하여 현재 도시 개발의 기반시설을 하듯 당시에도 상 ․ 하수시설 등 생활의 기본시설을 하였던 것을 추측해 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