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서원은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567년에 선산의 유학자 최응룡과 김취문이 중심이 되어 선산부사 송기충에게 서원 건립을 건의하였고, 송기충은 이를 경상감사를 거쳐 조정에까지 알려 마침내 재가를 받아 1570년에 금오산 밑에 건립하게 되었다.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0년 뒤인 1602년에 지금의 금오서원이 소재한 선산읍 원리의 남산 밑에 옮겨 복원하였다가 1609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모두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읍청루, 정학당, 내삼문, 상현묘를 동일축 선상에 두었으며 강당인 정학당의 앞면에는 동·서재를 두었다. 정학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막돌 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넓고 큰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워 5량가의 가구를 결조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으로, 온돌방의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대청 뒤쪽의 문비에는 각 칸마다 가운데 설주를 세운 영쌍창을 설치하고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상현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주상에는 외일출목의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5량가로 지붕을 높이기 위해 단연을 짧게 걸고 동자주와 공을 높였으며, 종량을 받는 양봉 끝에는 쇠서가 나와 있다. 읍청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주상에는 이익공으로 장식하였는데 익공쇠서는 단부가 사절된 둔탁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파련각을 하였다. 5량가로 종량을 받는 양봉 끝에는 상현묘와 마찬가지로 쇠서가 나와 있다. 대량 위에는 충량을 걸쳤는데, 대량은 충량을 받기 쉽게 만곡된 자연재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