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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900년 역사의 한국 최초 향교
- 한국 유교의 역사의 출발점인 강화 교동향교는 1127년에(고려 인종) 창립된 한국 최초의 향교다. 고려 충렬왕 12년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동향교의 역사는 어느덧 약 900년에 달하게 되었다.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한국 유교 문화의 구심점, 강화 교동향교를 소개한다. 조광조,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송시열 등 동국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교동향교는 강화도에 있는 한국 최초의 향교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기관으로서 유교 교육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다. 유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지방까지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한 향교는 교육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을 겸비하며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가 되어주었다. 교동향교에 들어서며 처음 보게 되는 것은 홍살문이다. 교동향교의 입구를 담당하는 붉은 문 오른쪽에는 ‘수령변장하마비’라는 글귀가 쓰여있는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하마비로, 여기에 쓰여있는 글귀는 수령과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를 통해 향교와 유교에 대한 존중을 읽을 수 있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인 교동향교는 공자의 신주와 한국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동무·서무로 이루어졌다. 또한 유생들을 교육하는 명륜당과 기숙 공간인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외삼문이 있어 지방 유생들의 학구열을 느껴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교동향교는 주변 시민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주말마다 교동향교 명륜당에 가면 ‘우리 집 가훈 쓰기’ 체험 등을 할 수 있어 눈앞에서 가훈이 붓으로 적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쉽게 보기 어려워진 서예를 통해 과거에 이곳에서 글공부를 했을 선비들의 모습을 짐작해 본다. 이 외에도 교동도에는 레트로를 콘셉트로 한 대룡시장과 국내 최북단 모노레일이 있는 화개산, 난정저수지 앞 해바라기 밭 등등 다양한 볼거리가 많아 교동향교에서 역사 여행을 한 뒤 같이 구경하기 좋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싶다면 강화 교동향교가 어떨까. 〇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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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900년 역사의 한국 최초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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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 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충남 서천군 한산면 향교촌에 위치하고 있는 한산향교는 사계절 다양한 모습이 매력이다. 천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고즈넉함 때문에, 코로나19로 다소 긴장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어딜 가든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거리두기가 습관이 되다 보니, 비대면 여행지를 자주 찾게 되는 것 같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선비들의 수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족들과 함께 왔다면 명랑하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니, 도시락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는 것도 좋다. 향교로 올라가는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홍살문과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하마비가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져 있었으며,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했다. 홍살문을 지나면 보호수 역할을 하고 있는, 약 4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만나게 된다. 1997년 보호수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보호수 관련 정보가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표지석에는 높이 16m 둘레 4m로 기록되어 있다. 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을 책임졌던 한산향교 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이 아닌, 왼쪽 길로 올라가다 보면 나온다. 한산향교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문을 오픈해 두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향교 주변은 선비들이 금방이라도 책을 들고 공부하고 있을 듯한 기분을 들게 해준다.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향교는 고려 태조 13년 생긴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한산의 인재들이 모여 어떤 날은 낭만을 이야기했고 어떤 날은 내일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학구열을 키웠던 장소다. 향교를 통해 수많은 역사를 배워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터전과 문화를 일궈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울 수도 있다. 과거 선비들의 고단했던 시간이 좋은 결과를 통해 낭만을 선물했지만, 현재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모님과 향교를 방문하면서 훗날 아름답게 빛낼 자신을 돌아볼 있게 해준다. 서천 한산향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에 그저 걷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한산향교는 1518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669년 유산 지방에서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고 1950년 6.25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성전 등이 있으며 5성, 송조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위치 : 충남 서천군 한산면 한산향교길 76-31 (지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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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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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좋은 성주 지역의 향교, 성주향교
- 성주향교는 보물 제 1575호이다. 성주향교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그 중심건물인 대성전과 명륜당을 성주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의 이름으로 지정된 것이다. 향교는 보통 평지에서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며, 높은 곳에서는 대성전을 높은 곳에, 명륜당을 낮은 곳에 배치하는 전묘후학 혹은 전학후묘의 구조를 갖는다. 일반적인 향교의 위치와는 달리, 성주향교는 특이한 배치 방법을 취하고 있다. 성주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대성전을 우측에, 명륜당을 좌측에 두었다. 이러한 배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구조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의 형태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양족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천장은 서까래가 있는 연등천장이며 온돌방 위에는 다락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며 17세기 초의 건물로 건립연대가 확실하다. 다포형식의 건축양식에서 당시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처마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공포의 형식으로 드문 형태이다. 대성전에 있는 또 다른 문은 태극문양으로 꾸며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유교 건축물 특성상 장식성보다는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기타시설로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라’ 라는 뜻의 돌기둥이다. 이는 조선시대 종묘나 궁궐 앞에 세워놓은 석비로 말을 타고 가는 자는 반드시 내려 예를 갖춰야 한다는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어 방문한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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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좋은 성주 지역의 향교, 성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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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인 나주향교
- 영산강 중심에서 문화를 꽃피운 나주, 그곳엔 푸른 나무와 고즈넉한 풍경이 어울려 고풍스러운 멋을 내는 나주향교가 있다. 충절 정신의 시작에는 향교가 있었다.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 태조 7년인 1397년에 지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 향교는 장수, 강릉 향교와 더불어 한국 3대 향교 중 하나로 옛 건물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된 편이다. 향교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다. 이곳에 들어가거나 지날 때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이다. 향교는 제향의 공간 대성전, 강학의 공간 명륜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으로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던 강당이다. 대정전은 명륜당보다 앞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점묘 후학의 배치를 선보인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 양쪽에는 기숙사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와 서재가 각 11칸이며 당시 교육 시설로는 매우 큰 규모였다. 한국 3대 향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수많은 인재가 학문을 닦았던 나주향교, 이곳에서 많게는 열 명 이상의 급제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으로 나주향교는 살아 숨 쉬는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문화재의 풍경과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나주 향교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 위치: 전라북도 나주시 향교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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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인 나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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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는 성주역사테마공원에서 알아봐요.
- 성주읍성은 고려시대 1380년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조선시대 1560년에는 석정으로 개축되었다. 성주는 과거 구미와 칠곡을 아우르는 영남지역의 큰 고을이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성주역사테마공원’을 준공하였고, 성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성주읍성은 2.1km에 달하는 긴 읍성이었지만 현재는 270m 구간만 복원되었다. 이곳은 원래 읍성문이었고 성지문이라 불리는 북문이었다. 왕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는 하마비도 있다. 네모 모양의 전통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섬이 2개 있어 쌍도점이라 불린다. 이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쌍도정도>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성주사고(보관소)는 전국 4개 사고(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중 하나로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창고였다. 화재와 임진왜란 등으로인해 훼손되었고 복구되지 못 한 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성주역사테마공원 안에는 성주 인사들과 관련된 비석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이전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건하여 정비하였다. 안쪽에 들어가면 충헌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충헌 김창집 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김창집 선생은 영조의 신임사화 때 역모 누명으로 거제도 유배되었다가 성주 요도로 이배되었다. 1750년 성주 고을의 뜻있는 선비들이 관아에 주청해 선생의 충의를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수명 유허비각을 세웠다. 6.25전쟁으로 비각은 손실되었고 비신은 파쇄 됐으나 2006년 복원하게 됐다. 광장에 조성된 물줄기는 끝나가는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가 된다. 넓은 지형과 더불어 푸른 녹지 잔디가 있어 산책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사진찍기에도 아름다운 장소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성주역사테마공원이 앞으로 성주를 넘어 경상북도의 기억에 남는 랜드마크가 되길 기대해본다. ○위치: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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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는 성주역사테마공원에서 알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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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정원 경상감영공원
-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곳으로 대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 중심부에는 국채보상운동공원, 2.28기념공원, 경상감영공원이 축을 이루고 있는데 도심지 내 녹지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도심 속 정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감영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주하는 조선시대 관청으로써 경상감영은 일제 강점기와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운용되었다가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최초 개장이 되었다. 1997년에는 담장허물기 운동과 함께 담장이 없어지고 공원으로 재정비하였다. 경상감영공원에는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대구유형문화재 1호 ‘선화당’과 관찰사의 처소로 쓰였으며 대구유형문화재 2호인 ‘징청각’이 있다. 또한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29기의 선정비와 병마절도사 이하는 말에서 내려 출입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하마비’가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이 외에도 분수, 돌담, 산책로,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은 통일의 종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사용한 측우기 모형 또한 볼 수 있는데, 이는 농업 또한 관찰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경상도에만 1개가 구비되었던 측우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작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시원한 분수대와 옛스러움이 그대로 녹아져 있는 건물양식, 녹지가 우거진 공원은 행인 뿐 아니라 점심 산책을 나온 회사원들의 발걸음도 닿는 곳이다. 또한 장기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 한적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공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이인성 화가의 전시가 열리기도 하며 각종 전시회가 야외에서 자리 잡기도 하는 곳이다. 지하에는 경상감영공원 주차장이 있어 도심지 내 부족한 주차공간 문제를 감당해주고 있다. ○ 위치: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 99 감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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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정원 경상감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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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900년 역사의 한국 최초 향교
- 한국 유교의 역사의 출발점인 강화 교동향교는 1127년에(고려 인종) 창립된 한국 최초의 향교다. 고려 충렬왕 12년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동향교의 역사는 어느덧 약 900년에 달하게 되었다.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한국 유교 문화의 구심점, 강화 교동향교를 소개한다. 조광조,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송시열 등 동국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교동향교는 강화도에 있는 한국 최초의 향교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기관으로서 유교 교육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다. 유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지방까지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한 향교는 교육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을 겸비하며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가 되어주었다. 교동향교에 들어서며 처음 보게 되는 것은 홍살문이다. 교동향교의 입구를 담당하는 붉은 문 오른쪽에는 ‘수령변장하마비’라는 글귀가 쓰여있는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하마비로, 여기에 쓰여있는 글귀는 수령과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를 통해 향교와 유교에 대한 존중을 읽을 수 있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인 교동향교는 공자의 신주와 한국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동무·서무로 이루어졌다. 또한 유생들을 교육하는 명륜당과 기숙 공간인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외삼문이 있어 지방 유생들의 학구열을 느껴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교동향교는 주변 시민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주말마다 교동향교 명륜당에 가면 ‘우리 집 가훈 쓰기’ 체험 등을 할 수 있어 눈앞에서 가훈이 붓으로 적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쉽게 보기 어려워진 서예를 통해 과거에 이곳에서 글공부를 했을 선비들의 모습을 짐작해 본다. 이 외에도 교동도에는 레트로를 콘셉트로 한 대룡시장과 국내 최북단 모노레일이 있는 화개산, 난정저수지 앞 해바라기 밭 등등 다양한 볼거리가 많아 교동향교에서 역사 여행을 한 뒤 같이 구경하기 좋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싶다면 강화 교동향교가 어떨까. 〇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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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900년 역사의 한국 최초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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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 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충남 서천군 한산면 향교촌에 위치하고 있는 한산향교는 사계절 다양한 모습이 매력이다. 천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고즈넉함 때문에, 코로나19로 다소 긴장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어딜 가든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거리두기가 습관이 되다 보니, 비대면 여행지를 자주 찾게 되는 것 같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선비들의 수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족들과 함께 왔다면 명랑하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으니, 도시락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는 것도 좋다. 향교로 올라가는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홍살문과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하마비가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져 있었으며,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했다. 홍살문을 지나면 보호수 역할을 하고 있는, 약 4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만나게 된다. 1997년 보호수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보호수 관련 정보가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표지석에는 높이 16m 둘레 4m로 기록되어 있다. 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을 책임졌던 한산향교 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이 아닌, 왼쪽 길로 올라가다 보면 나온다. 한산향교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문을 오픈해 두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향교 주변은 선비들이 금방이라도 책을 들고 공부하고 있을 듯한 기분을 들게 해준다.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향교는 고려 태조 13년 생긴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한산의 인재들이 모여 어떤 날은 낭만을 이야기했고 어떤 날은 내일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학구열을 키웠던 장소다. 향교를 통해 수많은 역사를 배워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터전과 문화를 일궈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울 수도 있다. 과거 선비들의 고단했던 시간이 좋은 결과를 통해 낭만을 선물했지만, 현재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모님과 향교를 방문하면서 훗날 아름답게 빛낼 자신을 돌아볼 있게 해준다. 서천 한산향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에 그저 걷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한산향교는 1518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669년 유산 지방에서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고 1950년 6.25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성전 등이 있으며 5성, 송조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위치 : 충남 서천군 한산면 한산향교길 76-31 (지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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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조선시대 교육기관 한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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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좋은 성주 지역의 향교, 성주향교
- 성주향교는 보물 제 1575호이다. 성주향교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그 중심건물인 대성전과 명륜당을 성주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의 이름으로 지정된 것이다. 향교는 보통 평지에서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을 뒤에 두며, 높은 곳에서는 대성전을 높은 곳에, 명륜당을 낮은 곳에 배치하는 전묘후학 혹은 전학후묘의 구조를 갖는다. 일반적인 향교의 위치와는 달리, 성주향교는 특이한 배치 방법을 취하고 있다. 성주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대성전을 우측에, 명륜당을 좌측에 두었다. 이러한 배치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구조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의 형태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양족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천장은 서까래가 있는 연등천장이며 온돌방 위에는 다락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며 17세기 초의 건물로 건립연대가 확실하다. 다포형식의 건축양식에서 당시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처마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공포의 형식으로 드문 형태이다. 대성전에 있는 또 다른 문은 태극문양으로 꾸며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유교 건축물 특성상 장식성보다는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기타시설로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라’ 라는 뜻의 돌기둥이다. 이는 조선시대 종묘나 궁궐 앞에 세워놓은 석비로 말을 타고 가는 자는 반드시 내려 예를 갖춰야 한다는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어 방문한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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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좋은 성주 지역의 향교, 성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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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인 나주향교
- 영산강 중심에서 문화를 꽃피운 나주, 그곳엔 푸른 나무와 고즈넉한 풍경이 어울려 고풍스러운 멋을 내는 나주향교가 있다. 충절 정신의 시작에는 향교가 있었다.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 태조 7년인 1397년에 지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 향교는 장수, 강릉 향교와 더불어 한국 3대 향교 중 하나로 옛 건물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된 편이다. 향교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다. 이곳에 들어가거나 지날 때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이다. 향교는 제향의 공간 대성전, 강학의 공간 명륜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으로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던 강당이다. 대정전은 명륜당보다 앞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점묘 후학의 배치를 선보인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 양쪽에는 기숙사의 역할을 수행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와 서재가 각 11칸이며 당시 교육 시설로는 매우 큰 규모였다. 한국 3대 향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수많은 인재가 학문을 닦았던 나주향교, 이곳에서 많게는 열 명 이상의 급제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으로 나주향교는 살아 숨 쉬는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문화재의 풍경과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나주 향교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 위치: 전라북도 나주시 향교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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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문화유산인 나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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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는 성주역사테마공원에서 알아봐요.
- 성주읍성은 고려시대 1380년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조선시대 1560년에는 석정으로 개축되었다. 성주는 과거 구미와 칠곡을 아우르는 영남지역의 큰 고을이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성주역사테마공원’을 준공하였고, 성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성주읍성은 2.1km에 달하는 긴 읍성이었지만 현재는 270m 구간만 복원되었다. 이곳은 원래 읍성문이었고 성지문이라 불리는 북문이었다. 왕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는 하마비도 있다. 네모 모양의 전통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섬이 2개 있어 쌍도점이라 불린다. 이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쌍도정도>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성주사고(보관소)는 전국 4개 사고(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중 하나로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한 역사 기록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창고였다. 화재와 임진왜란 등으로인해 훼손되었고 복구되지 못 한 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성주역사테마공원 안에는 성주 인사들과 관련된 비석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이전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건하여 정비하였다. 안쪽에 들어가면 충헌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충헌 김창집 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김창집 선생은 영조의 신임사화 때 역모 누명으로 거제도 유배되었다가 성주 요도로 이배되었다. 1750년 성주 고을의 뜻있는 선비들이 관아에 주청해 선생의 충의를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수명 유허비각을 세웠다. 6.25전쟁으로 비각은 손실되었고 비신은 파쇄 됐으나 2006년 복원하게 됐다. 광장에 조성된 물줄기는 끝나가는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가 된다. 넓은 지형과 더불어 푸른 녹지 잔디가 있어 산책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사진찍기에도 아름다운 장소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성주역사테마공원이 앞으로 성주를 넘어 경상북도의 기억에 남는 랜드마크가 되길 기대해본다. ○위치: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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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는 성주역사테마공원에서 알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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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정원 경상감영공원
-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곳으로 대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 중심부에는 국채보상운동공원, 2.28기념공원, 경상감영공원이 축을 이루고 있는데 도심지 내 녹지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도심 속 정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감영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주하는 조선시대 관청으로써 경상감영은 일제 강점기와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운용되었다가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최초 개장이 되었다. 1997년에는 담장허물기 운동과 함께 담장이 없어지고 공원으로 재정비하였다. 경상감영공원에는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대구유형문화재 1호 ‘선화당’과 관찰사의 처소로 쓰였으며 대구유형문화재 2호인 ‘징청각’이 있다. 또한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29기의 선정비와 병마절도사 이하는 말에서 내려 출입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하마비’가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이 외에도 분수, 돌담, 산책로,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은 통일의 종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사용한 측우기 모형 또한 볼 수 있는데, 이는 농업 또한 관찰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경상도에만 1개가 구비되었던 측우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작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시원한 분수대와 옛스러움이 그대로 녹아져 있는 건물양식, 녹지가 우거진 공원은 행인 뿐 아니라 점심 산책을 나온 회사원들의 발걸음도 닿는 곳이다. 또한 장기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 한적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공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이인성 화가의 전시가 열리기도 하며 각종 전시회가 야외에서 자리 잡기도 하는 곳이다. 지하에는 경상감영공원 주차장이 있어 도심지 내 부족한 주차공간 문제를 감당해주고 있다. ○ 위치: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 99 감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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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정원 경상감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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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전통이 잘 어우러진 전주 경기전
-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부르다가 1442년(세종24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신성함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어진을 모신 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물 안쪽 내·외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이기 때문이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전에 사고가 설치된 것은 1439년(세종21년)의 일이다. 경내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유형문화재 제2호)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肇慶廟·유형문화재 제16호)가 있다. 특히 태조 어진(국보 제317호)과 함께 현존하는 조선왕조 어진들이 모셔진 어진박물관도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이 오랫동안 관광객과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도심속에 담긴 고풍스러운 모습과 우거진 수목 덕분이다. 경기전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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